여행이야기

형제는 훌륭했다 . 통영의 자랑 외교관 김용식, 소설가 김용익

이바구아지매 2013. 5. 3.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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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이팅

 

통영의 두 형제이야기

 

 

요즘 세계는  한국이 낳은 국제가수  싸이를 외치며  열광하고 있습니다.

싸이, 대단합니다.영미권 브리테니커 백과사전에도  한국의 가수겸 레퍼로 등재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한류라는  화려한 문화콘텐츠의 뿌듯한  성과가  있기까지는

이미 오래 전  세계속에  한국 문화예술의   씨앗을  뿌리고  가꾼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65년 전 이미 대한민국을 세계에  알리기 시작한  외교관  김용식, 소설가  김용익 형제가 바로 그들인데요.

먼저 그들이 살았던  시대적 배경을 알아보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봅니다.

 

   1945년 8월15일 일제강점기의  수탈과 압제의 고통에서 해방을 맞았지만  혼란스런   분위기를  틈타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다시 기습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은  중부전선에서  2년여 간의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는 교착상태에서 1953년 7월27일  판문점에서

3년간의 6.25전쟁을  끝내는 정전협정을 체결하였습니다.

 

이렇게  암울했던 1950년대에

  작은나라  대한민국의 국익을  위해 두주먹 불끈 쥐고  세계로 나아갔던,

 

외교관 김용식  (1913~1995)

1913년 11월11일  경남 통영에서  출생, 통영공립보통학교와 경성중앙고등보통학교를 마치고 1937년 일본 주오중앙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후,1939년 일본고등문관 사법과에 합격하여 해방 후 3년간 변호사로 활동하였습니다.

1949년 홍콩주재영사로 발탁된 이래  한국의 독립과 정부수립  한국전쟁 , 세계적인 냉전 ,남북한의 첨예한 

 대치와 경쟁적인 대결외교가 일어났던 33년동안  외교관과 행정가로서

국제사회에 우리나라의 위상을  다지는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주호놀루우 총영사 , 주 일본 공사,주 프랑스 공사, 주 제네바 및 유럽 유엔 사무소장,

주 영국대사,주 필리핀대사를 역임하였습니다.1963년 외무부장관으로

기용되었고 유엔대사  대통령 외교담당 , 특별보좌관을 거쳐  

  외무부장관,,국토통일원장관을 연임하였으며,

1980년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역임, 1995년 3월31일

향년 82세에 숙환으로 별세  대한민국의 국익을 위해 노력한  분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김용식 전 외무부장관

 

 

김용식의  저서 ' 새벽을 여는 약속'  

 

마침 생가로 가는 길에 주전3길에서  만난  통영시민 한분께 외교관 김용식을 혹시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알다마다요 김용식 전 외무부장관은 무려  33년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외교관으로서 

 국익을 위해 세계로 나가 큰 일 참 많이 했어요.

당시 우리나라는  완전   폐허더미로  절망적이었지만      

 그런 나라를 대변하는  외교능력을 발휘하였지요".(통영시  김정식  76)

 

 

 

 

영어의 바다애서 헤엄치다

 

이번에는 미국으로  날아가서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소설을 쓰겠다고 덤빈 용감했던  소설가 김용익을

알아봅니다.

 

 

 

 

 

 '

 

 

소설가 김용익 (1920~1995)

1920년 경남 통영에서 출생, 중앙중학을 거쳐 일본  아오야마청산 학원 영문과를 졸업 ,

1948년  1차 도미하여 남플로리다 대학교 켄터기대학교와  아이오아 대학교 대학원 서설 창작부에서 수학,맥도웰콜로니 Mcdowel Colony,야도

Yado 헌팅턴 하트포드재단 Huntington Hartford Foundation, 버지니아 창작 예술센터 Virginia Center  Art  둥 미국의 예술가  지원기관 Artist

Colony에서 창작지원금을 받고 집필활동, 1957년부터 64년까지는 고려대 이화여대 영문학과에서  강의

이 시기에 <한국의 달 Moons of Korea>등을 국내외에서 출판하였습니다.

한국인의 서정을 영어로 노래하는 작가였던 그의 주요 작품은 대부분 영어로 집필된 것이었으나 국내에서는 한굴로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1964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서일리노이 대학교 바클리의 캘리포니아 대학교  피츠버그 듀켄 대학교 등에서 소설창작을 강의하였습니다.

1975년에는 미국국가문학지원금을 받았으며  1981년과  1983년에는펜실베니아 문학지원금 심사위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1982년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자료집 > (연합통신발간~ 영문판)에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3명의 한국인 작가 (most  famous writers) 강용홀

김은국과 함께 소개 됐다. 1990년 <꽃신  The Wedding Shoes> 으로 한국문인협회가 주관하는  제1회'해외한국문학상',

같은 해 9월 15일에는 제 7회 충무시문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1994년 고려대 초빙교수로 귀국했다가 1995년 4월11일 지병인 심장병으로 

 서울 고려대병원에서  별세, 통영시 용남면 선영에 묻혔습니다.

 

 

2년 전 작가 김용익의 처가가 있았던   거제시 옥포동으로  그를 아는 지인을 찾아 가서 인터뷰한 내용입니다.

 

 

" 김용익선생  참 대단한 분입니다. 

 세계적인 소설가지요. 선생은  국내보다 오히려 해외에서  명성이 더 대단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미국의 여러대학에서 소설창작을 직접 가르치기도 했어요.  

 모국어도 아니고   둘째말(일본어) 도 아닌  세째말(영어)로  슬프고도 아름다운

 '통영이야기를 '꽃신'이란  소설속에   고스란히   담아내었습니다, 

 힘 없고 가난한 우리민족의 슬픔과 한을  

작품으로 승화시켜  세계를 감동시킨 한마디로  위대한 사람이에요 . "(거제시 옥포동 김형래  74)

 

 

 

 

 

 

글을 쓰겠다고 생각했다면  반드시  읽어봐야 할      '책 쓰는 모험'

 

 

1948년  Florida 상대에서 학과목 이외에 소설을  시작했을 때 기숙사에서  한방을 쓰던 학생이 나에게 말했다.

'내가 너 같으면 이 나라에서 그렇게 시간을 허비 안 할 것이다..

만일 미국서 네가 책 한 권을  출판하면  내가 네게 500불을 주겠다. 미국의 출판계에 뚫고 들어가기란 영어를 모국어로  타고 난 미국

작가에게도  거의 불가능한 모험이다."

나는 영어를 마스타 했다기에는 감감하지만  나는 그 말을 귀담아 듣지를 않았다,

제2차 대전 때 동양에서는 영어 공부 하는  것이 제일 시대에 안 맞는 것이라고 내 주의 사람들이 우겼지만  나는

영문학 공부가  하고 싶어서 했다. 일단 미국으로  유학 오니 어찌나 글을 쓰고  싶어서 내 영어가  소설 쓰기에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는 아침 일찍  세 시간씩을 꼭 책 쓰는데 보냈다.

 

영어공뷰를  더 할수록 내가 지금 하는 '말' 문제가 자꾸  더 크게 늘어났다. 한국 감정과 사상에  젖어 있는 어떤 관념과 물건을 영어로  그리려고 하니

나는 한국어의  양이 두 말 사이에 아주 단순한 표현에서도 뉘앙스에 대해서 많이 느끼게 되었다.

가령 "Kim entered the house" 하면  아주 단순하게 보이지만  한국잡의 구조에 대해서  확실한 시각적 "상 <Visual  image>을 갖지 않았다면

독자의 이해가 완전하지 못하다.

 

한국사람이 "집 안에 있다"in the house>하면 마당에도 있는 것이고  마루에도 있는 것이고  또는 조그마한 방에도 있는 것이니 말이다.

서구의 읨로서 <집에 들어갔다>는 각별한 그림을 주려고 하며는 house보다도  room에 들어갔다고 <간혹>해야 되었다.

내가 여기서 <간혹 > 이라 하는 의미는 많은 한국사람들이  그의 손들을 마루에서 대접하면서도  대접을 잘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까닭이며 또 한국식으로  방에 들어갔다고  하는 말은 영어의 의미로서 보다도 좀더 친절한  행동이 되기가 쉽다.

또 한가지 "한중우 가랭이에  두 다리 끼고  그 사람을 환영했다" 고 우리 민속의 표현을 하려면 

 한국 바지는 미국 바지보다도 폭이 넓다는 것을 말해 줘야 되니(넓다baggy) 라는 형용사를 아쉬운대로 하나 넣어 줘야 된다.

문제가 이렇게 많은데 내가 말한 것은 조그마한 예(example)일 뿐이다.

나는 친구들에게 영어뿐만 아니고 말으 뉘앙스에 대해 늘 물어가면서 생각했다.

 

Florida에서  3년 동안  공부하면서  나는 학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고  또 Kentucky 대로  책 쓰는 도박을 계속하려고 옮겨 갔다.

겨울 방학 때에 나는 가죽으로 표지가 된 귀중도서 cover를 wax로 닦는 일을  도서관에서 한 시간에 50전씩 받으며 했는데 , 

 늘 나의 마음에는 장차 내가 쓰는 책이 출판되고  이 빛나고 향기로운 가죽으로써 cover가 되는 꿈을 꿨다.

이층 귀중  도서실에선  나 혼자만 일을 하고 있었다. 내 두 손이 기름과 wax에 가득 차서 책 cover를 윤내갈  때에  나는 시집을  한 권  내 앞에 두고

소리를 내 가며 읽었다. 詩를  읽으면 페이지를  자주 넘기지 않아도  되고 또  그 시에 담겨 있는 선율있는 목소리가 그리 좋았다.

내 더러운 손으로  그 페이지를 곧 넘길 수 없기 때믄에  내가 읽는 시가 중단될 때마다 마치 내가 좋아하는 

 노래의 레코드에 금이 가서  바늘이 빠진 것같이 실망했다.

 

하루는 Rovert Frost 의 <The Rood  Not Taken(가지 않은 그 길)>을 읽고 있을 때 그곳  부도서  관장이 바로 내 뒤에 서 있는 것을 깨달았다.

학생들이 도서관에서 일하는  시간에 책을 읽는 것에 대해서 도서관측은 엄격히 다스렸으니 나 보고 이 부인이 야단을

칠는지 혹은 파면시킬는지,  내가 그 여자 보고 인사도 안 하고 쳐다도 안 보고  가만히 앉아 있으니 

그 여자의 까칠한 손이  마치 그 책을  뺏을 것같이 선뜻 다가오더니 어쩐지 뺏지 않고  그의 손가락으로  한 페이지를  넘겨 주고  아무 말 없이 방을 나가버렸다.

그 시를 마지막으로 읽을 때에  나는 마음이 퍽 감명했고그 시의 마지막은

<and  that has made all the difference(그것이  그 작은 일에  그토록이나 큰

차이를 가져왔다)> 였다.

 

나는 책 쓰는 모험을  계속해 갔다.1953년 lowa 대학   창작부에 등록했을  적에는  벌써 6년 동안이나 

 소설을 쓴 셈이었고  장편 소설 하나를 끝마쳤다.

그래서 New York의 여러 출판사에 보내기  시작했다. 기차편으로 원고를 보내야 했고 돌려줄 우표 까지 넣어야 했다.

그러고 보니 한 번 원고를  우송하면 거의 5달러가 든다.원고가 퇴짜를 맞고 나에게

돌아오기에는 한달가량 걸려서 이것이 매달 평상 비용이 됐다.

원고 우송하는 데 보태쓸려고  버스 값을 아껴서 나는 lowa 市 교외에 있는 기차역으로  늘 걸어갔다.

기차 수송계 사람은  늘 보내면 자꾸 돌아오는  우송물을 보고  아주 이상한 눈치로 나를 대했는데  하루는

"대체 이 안에 뭣이 있는가?" 하고 물어서 나는 설명을  하니

"lowa 市의 한 늙은 영감이  당신 같이  메달 원고를  부치려고 늘 나타난다"고 얘기를 했다.

 

그래도 나는 매달 그곳에 가니  그 우송계 계원을 만날 때마다  조금 창피스러웠다.

그럭저럭 서로  알게 됐는데  나에게 한국말은 모국어고

일본말은 일본  점령당시에  배운 말이고  영어는 중학서부터  배우기 시작했으니  세째말이란것을 그도 알았다.

하루는 그 노인과  그의 원고에 대해  어찌 됐느냐 물으니

"영감 원고는 늘 돌아왔고 지금은 그 영감도 죽었다"고 했다. 실망했지만  나는 계속 원고를 부쳤다.

소설 원고를 우송하고  받는 게임을 계속 하면서  몇 개 쓴 단편소설도 같이 부치고 받았다.

퇴짜맞은 통지서가 자꾸 쌓였지만  영어를 마스터하는 데는 좀 진보가 있었다.

날과 계절이 자꾸 지나가니 초조해졌다. 그전부다 더 힘을 내서 책을 읽고 글을 썼다.

 

메인(Main)주에  한 번 여행갔을 적에  우연히 바닷가에 서 있는  젊은이를 만났는데  그 때 그 사람은 보기에  도스토에프스키의<백치>같이

고독해 보여서 내가 말을 건 게 계기가 되었었다.그의 집안도 알게 되어 다음 여름방학에는 lowa에서 Main주로 콤페니언 (companion)

직업을 얻어갔다.가는 도중 기차 안에서도 아침 일찍 세시간의 글쓰기를 종교의 의식처럼  계속했다.낮에는 그 사람의

companion으로서  또 그의 조카들에게  책을 읽어 주면서 나는 영어의 리듬을 즐겼다. 밤에는 늦게까지 글을 썼는데  동네에

"한국사람은 잘 적에도 불을 켜놓고 자기를 좋아한다"는 말이 돌았다.방학이 끝나면  lpwa市로 돌아오는데  순전히 글을 쓰려고만 돌아왔다.

lowa 市의 iand, lad, 미세스 앤더슨은 "주말에도 방을 떠나지 않으니 방소제를 도무지 할 수 없다".고

불평했고  또 "나도 자식이 있는데 외국에 가서 항상 방 안에만 앉아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딱딱거려서 그 할머니 말이 옳다고 하면서

방을 나올 때는 이제는 living language를 해  보려 했다.학교 야경꾼하고  혹은 밤일 하는 소제부들 하고 늘 같이 돌아다녔고 그 사람들에게서

교실에서 배우지 못하는 영어를  또 미국물정을 귀담아 들으면서 수업료 없이 배웠다. 그 대학병원 카페테리아에서

일자리를 얻어 갈 때에는  시를 하나 둘 조그만 종이조각에 써 가지고  강을 건너 걸어  갈 적에 늘 읽었다.그리고 식당에서 음식을

써브할 적에도 카운터에 그 종이를 숨겨놓고  음식을 나눠 주며  그 시를 암송하려 애썼는데  한 이 주일이 되니 파면이 됐다.

사실인즉 학위라고는 조금도 관심이 없어  택한 학과목에 A 를 받더라도 별로 좋지는 않고 다만 내가 쓴 소설 하나를 출판사에서 받아

주기만 늘 원했다.한번  퇴짜받은 편지들이  쌓여가는 우두커니 보고 있으면  아마 이것이 불가능한  것인가 느끼기  시작했다.

 

어느 토요일날 창 밖을 보니  눈이 많이 내리고 있는데  나는 대체 한국사람으로서

둘째말로서 아닌 세째말로서 인간 감정의 드라마을 소설로 내가 쓰려고  하는 괴상망측한  생각을 어떻게  했는가  하며 자신을 의심했다.

아주 기가 죽어서 바깥으로 나가 타운에 가서 포켓에 남은 돈을 다  털어 축음기 값싼  것을 하나 샀다.

적어도 음악 듣는 것은 할 수 있다고 비발디의 <4계>를 빌려 가지고  종일  아무 것도 먹지 않고 계속 틀면서 들었다.

가만히 앉아서 듣고  눈오는 것을 보니  이상한 환상이 나타났다. 한국 꽃신 한 켤레가 나타나더니  눈 오는데 자꾸 나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내가 마음 가운데서  그 꽃신을 자꾸  따라가는데  그 꽃신 신은 사람의  뒷 모습만 보고  조그마한 조각배 같은 흰버선

 

신은 꽃신의 뒤축을 내가 자꾸 보고 있었다. 그 비단 꽃신이 먼산을 자꾸자꾸 걸어가고  있고 대체 그 신을 신은 여인이 누군가 보고 싶은데

그 신 신은 아가씨와 그 신은 도무지 돌아서지 않고 볼 수가 없었다.그 아름다운 꽃신을 안 놓치려고 애쓰며  그 신발을 자꾸 따라 갈 때에

그 제일 좋은 비단이 눈에 젖을까봐 걱정하며 따라가는 내 가슴이 자꾸 발닥거렸다.

 

" 이 신을 잡을 수 없는 임자를 내가 한 번 보았으면 진짜 얘기를 쓸 수 있겠지 ."

환상에서 나와서 결심을 하고 새 정신이 확 들었다.하루종일 먹지 않은 배가 고프기 시작하여 처음으로 길모퉁이 식료품 거게(grocery)

에 가니 "메리 크리스마스" 명랑하게 인사하고  몇 마디 격려하는  말을 해 준다.나는 샌드위치  고기를 두세 쪽 달라고  했다.

원고를 부치느라 돈을 너무 많이 쓰고 축음기 사려고 갑자기 큰 소비를 한 때문에 음식 살 돈이 별로 없었다.그런데 그고기 카운터 책임자

(butcher)큰 고기  덩어리를 잡기에

"아니 두 서너 쪽만 주시오"

급히 말하니 곧 그 고기를 턱 싸서 붉은 연필로 20센트라고 섰다.이 고기는 2달러어치가 될 것이었다.

"이거 진짜 20센트요?" 하니 "예스 씨----"했다.캐셔에 지불하러 가니까 여자는 고기 꾸러미를 자세히  보더니 나를 한 번

건너다 보고  아무 말 없이  20센트를 받았다. 그 후로도 내가 그 우육상에 가기만 하면 고기 뭉치가 더 커지는 것 같고 값은 항상 20센트였다.

이 우육상 때문에 <꽃신 (단편>을 쓰는 한달 반 동안은 잘 먹었다.이 <꽃신> 얘기에는 한국 산간에 있는 백정이

망해가는 꽃신집 어린 딸에게 적은 돈을 들고 오지만 늘 관대하니 많이 준다.또 백정들의 눈을 통해서 그 얘기를 다룬다.내 속으로

이 원한 (꽃신)을  내 마음 가운데 따르는 동안에 영어로서 쓰는 글 가운데 내 자신의 한국말의 리듬을 잡으려 하고 또 동시에 모든 것을

구체적 이미지(image)로 표현함으로써오해받을 찬스를 주지 않으려 애썼다.어떠한 신(scene)을 묘사하기가 영어로서 곤란할 때마다

늘 유혹은 슬쩍 다음으로 넘어가고 싶었다.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그 작품에 꼭 맞는 (속하는) 어떠한  신이나 단  말  한 마디라도

안하고 어물어물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웠고 이 가시같이 어려운 말 또는 글발, 언어의 장멱을

가져오는 것은 바로 그것이 그 소설의 맥 뛰고 숨쉬는 그 말이라는 것을 알고 그것을 꼭 찾으려고 애쓴다.

 

<꽃신>을 완성한 다음에 lowa大 창작부에  있는 시인 Paul Angle에게 주었는데 그가 바빠서 <angel of Forest>의 작가인

Margaret Young 에게 나의 이 원고를 줬다.나를 전화로 불러서

"This is Wonderful. 바로 Harper's Bazaar에 보내시오"크게 흘분한 Margaret Young 의 목소리가 들린  지 열흘 후에

나의 우체통에는 늘 눈 익은 보기 싫은  누런 봉투 (되돌아온 원고)가 아니고 Harper's Bazaar誌의 편집자 Vice Moris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꽃신>을 출판하겠다.하며 250달러를 주겠다고 했다.

 

큰 기쁨의 이 때에 나는 같이 좋아할 사람이 없었다.

 

이 소설(꽃신)이 출판되자 고드 London Bazaar誌에서 국제 전보가 왔는데

"그 <꽃신>에 25기니(guonea)를 주겠다는 것"이었다.동시에  lowa 市에 아마튜어 발레단체가 그 얘기를 위주로 발레를 기획하면서

길 모퉁이 식료품점(grocery)앞 전봇대에 <발레 꽃신춤> 이란 광고가 붙었다.

 

내 단편 소설이  Mademoiselle 誌, 이탈리아의 國際잡지 Botteghe Oscure 誌,New Yorker誌, 등에

나온 이후  그 돈으로 나는  10년 만에 고국에 돌아왔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한편  나는  영어와 한국 말로 글 쓰는 것을 계속했다.1960년 나의 옛 친구를 만나러 미국으로 다시와서

Kentucky 大에 들렀을 때  그 귀중도서부  부도서관장을 만나보고 나는 퍽 기뻤다.

그 부인은 내가 일하는 동안에 시를 읽던 것과 나를 위해 페이지를 넘겨준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부인이 나에게 요즘은 뭣을 하느냐 묻기에 美잡지에 소설을  썼고 또 Little Brown 출판사에서 청소년  소설 두 개가 나왔고

Alfred A. Knopf출판사에서  장펀<뒤웅박>이 나올것이라고  말하니 믿지 안니하는  것같이  천천히 도서관 목록을 보고는 그리 좋아하면서

중국 요리점으로  디너(dinner)를 바로 초청해  줬다.

그기서 저녁을 먹은 후에  그 부인의 자동차로  양들이 먹고 있는 초원<Blue grass country)을  옛날 얘기를  하면서 빙빙 돌았다.

그 해 Little Brown출판사로부터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았는데 Florida Kenturcky에서  쓴 청소년 소설 <The Happy Days>

책을 아름답게  가죽으로 장정한 것이었다.

(A Book Writing Venture; 1964년 9월 <The Writer>誌 게재) ~ 작가 노우트~

 

 

 

 

 통영시  태평동 22번지  

김용식, 김용익 생가  마침내 기념관으로 태어나다

 

 

2013년 04월18일과  04월20일  양일간에 걸쳐   

 

통영시 태평동 22번지에서 태어나고 자란  외교관 김용식(형님), 소설가 김용익(동생) 형제의 생가를   찾아갔습니다.

      4월20일(토))은   비마저  추적추적 내려서  우산을 들고  갔더니  

안내소 여직원의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이곳은  아직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까닭에

   찾는 이가 거의 없는데 ,하루 글러   두번씩이나 ?...라는 눈빛이었습니다. 

"우산은 어디다 둘까요?  빨간 카페트와 예쁜 꽃신이 빗물에 젖으면 어쩌지요?"

"괜찮아요  걱정마시고   그냥  어디라도 편하게 두세요"

라며 그녀가 사슴같은 눈망울을 굴리며  맑게 웃어주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자랑이자 통영의 자랑인 두형제가  태어나서  유년기를  보냈던 주전골 생가는

  한동안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지만 통영시가  김용식,김용익 형제를 위해 기념관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김수환목사(김용식의 장남)가 사비로  구입  기부채납,

통영시에서 내부를 조금  리모델링하여 지난 04월 17일 기념관으로 개관하게 되었답니다.

 뜻깊은  개관식에는   '꽃신'의  작가 김용익의 둘째 사위  정운성(조선일보 기자)씨가  참석하여

김수환목사를 대신하여 축사를 읽었습니다.

"통영에서 기념관 조성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기뻤으며  이집에서 살았던 저의 가족 모두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계속 고향을 간직할  수 있을것 같아서

집을 선뜻사서 기증했습니다"

 

 

 김용식, 김용익 기념관이 탄생하기까지는  

통영의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시민모임인  '통영예술의 향기" 노력이  있었습니다.

 

  

 

 

 

 

2013 04 17,  기념관 개관식이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조국이  암울했던 시기에 세계로 나아가   용감했던   두형제이야기로

가득 채운  기념관으로 갑니다.

 

 

 

소설가 김용익의 대표작 ' 꽃신'<The  Wedding  Shoes >  <Silk Brocade 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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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가념관 개관식이 있었던  뒷날이라    담벼락엔 두형제의 모습이 담긴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습니다.

 

 

 

듬성듬성 피어난 유채꽃 너머로

기념관이란 표시가  대문가에 붙어 있지 않았더라면 외형적으로는

크게 달라진것이 없어 그냥 평범한 이웃집처럼 보입니다.

 

 

 

 

 

 

 

주전골 혹은   태평동 22번지 집 앞의  골목길

 

 

 

  소설    '꽃신' 의 실제 배경이 되었던  꽃신집은  

 작가가 살았던 바로 앞집이었다고 합니다.

 

울타리 너머로 골목길의 폭은  두팔 벌리면  닿을거리의 앞집에는  꽃신장이가  어린 딸과

부인과 함께 가난하게  살았지만  꽃신을 만든다는 긍지와 자부심은  작품을 읽는 중간중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날  큰길에서 동쪽으로 난 골목길로 들어서며  '꽃신' 이 태어났던 당시가 느껴질까  ? 하며 걷고 있는데

 갑자기  여자의 앙칼진 목소리가 골목길로  쏟아집니다.

   근처의  야트막한 울타리 너머 낡은 기와집쯤 같습니다.내용을 들어보니  그 집의  남자는 아마도

어제 나가서  한댓잠을 자고  돌아온것 같습니다.  뜬눈으로  밤을 새며  기다린 아내에게

  미안해 하는 기색조차 없이 벌렁 드러 누워버렸는지  

분에 못이긴  그의 아내가 악을 쓰며  대성통곡을 쏟아내자  찢어질듯 

고함소리가  담을 넘어  좁다란  골목길을 가득 채웠습니다.

 

 

 

 

 

 

서쪽의  대문앞에서

 

기념관을 들어서니  출입문이  동쪽에도  하나 더   생겼습니다.

이 대문은  기존에 있던 서쪽대문 앞입니다.

기념관은

한국을 대표하는 두사람을 기억하며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즐겨찾는  

명소가 되고 또한  교육의 장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래봅니다..

 

 

 

통영시  태평동 22번지 , 주전골 13길, 

대문옆으로   외교관 김용식,(1913 -1995 )

소설가 김용익 (1920-1995)살았던 곳으로 표지석이 나란히 서 있습니다. 

 

 

 

2년전 태평동 22번지 , 풍경

 

리모델링 전  다른사람이 살고 있었던  2011년 가을, 이곳을 찾았더니

"그렇게 휼륭한 분이 이 집에서 태어나고 자란 생가였군요

잘 몰랐는데  검색 해 봐야겠어요"

라고 말하던 젊은 남자는  집을 선뜻 내 놓고  다른곳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리모델링 전 김용식, 김용익  생가에서 , '빨강머리 앤 '

 

2011년 늦은  가을,

  빨갛게 익은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가을로 가득한 뜨락이  무척이나 서정적이었습니다. 

사루비아꽃과  봉숭아꽃이  뜨락을 가득 채웠던집  

이곳에서 작가는 어린  시절   울너머  신집에서

꽃신(The Wedding Shose)을 만드는 광경을 보며 자랐다고  하였습니다.

훗날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영어로 소설쓰기에 끊임없이 도전하였지만

 출판사로 보낸 원고는  번번이  퇴짜를 맞고 돌아오자

작가는 부질없는 일에 도전하고 있는건 아닌지  회의를 느끼게  되었으며  여러 날  먹지도 않고  낙심하고 있던

어느 날 ,  눈 앞에서  통영의   꽃신이  뒤축을  간들거리며  나타나더니  둥둥 떠서 지나가는 모습이 선명하게

 떠 올랐고  그 아름다운 환영을 쫓으며  꽃신을 신은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보려고 애를 쓰며,

 또한 떠오른  영감을 놓치지 않으려고 

기어코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태평동 토성고개 너머로   꽃신쟁이의 어린  딸을 좋아했던   백정집(통영에서는 태울의 집으로 불림))이  있었다고

작가의  육성이 녹음된 영상물을 통하여 작품이 태어난 배경과  더불어 ' 책 쓰는 모험' 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산고였는지를

   들려 주었습니다.

 

 

 

 

 

 

 

 

 

  오래전부터 나는 우리나라에서  또는  통영에서  이렇게  훌륭한 두사람이 알려지지 않는지

 몹시 궁금하였습니다.

특히 세계가 감동하고 격찬한   소설가 김용익의  작품 '꽃신,  뒤웅박, 행복의 날, 겨울의 사랑   해녀  앗시땅, 

금시계 ,동네술,뱜배  등은 교과서에 수록하여 우리의 미래인 청소년들이

 좋은작품으로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또한 청소년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도서로  추천하고 싶습니다.

작품의 시대 배경은  작가가 살았던  일제강점기와  6,25 사변까지의   고단했던 삶을  다루고 있습니다.

 

  힘 없는 작은나라를 위해 33년간   큰 외교를   펼친 외교관 김용식과  

'이상한 나라  한국' 1950년대의 서사시  구미 10여개국에서 극찬한 마술의 펜 

 '꽃신' 의 작가  김용익을  세계는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두 형제는 가난하고  힘 없는 작은나라를  큰 외교와  펜의 힘으로 세상에 알렸습니다.

 

.

 

 

 

 

 

기념관의 내부 구조는  살던 집을 조금 내부수리한  23평 정도로  소박하게 꾸며져 있습니다.

 

 

 

 

 

 

기념관에는 김용식 전 외무부장관의 33년간의  외교활동을  알기 쉽게  영상물과 함께  전시되어 있어  외고관이  꿈인

청소년들에게  이 곳은 분명 좋은 교육의 장이 돨것 같습니다.

 

 

 

 

주미대사 시절 김용식은

1970년 미국 의회 의원들에게  로비를 시도한 '코리아게이트(박동선사건)'으로  한국과 미국간의

불편한 관계가 조성 되었을 때  주미대사로서 한,미동맹 발전을 이끌고,

한반도 평화 정책을 위한 외교적 노력을 펼치는 등   

고도의 외교력으로 외교 문제를 풀어가는 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쉬지 않고 노력했던  열정을   기억합니다.

 

 

 

 

 

 

 

김용익의 소설 '꽃신' 은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로  '통영별곡'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인 '꽃신'의    시대적 배경은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까지를 다루었으며

 우리민족의 전통을 상징하며  결혼할 때  신부가  신었던  화려하고 아름다운 신발이었습니다.

 작품을 들여 다 보면  결혼하는 신부가 신었던 예술품에 가까운   꽃신을 만드는 장인의  자존심이

  도도하게 혹은  외롭고  쓸쓸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일본은 문화말살정책으로  값싼 고무신을 공장에서 대량 생산하여 

한국의  전통인  꽃신을  신고 혼인하는 풍습까지 무너뜨리고 맙니다.

당시 국내에는  500여명이 넘는  장인들이  꽃신을 만들며 살아가고 있었지만

 고무신의 공격에  밀려 나라의  운명처럼  몰락해 갔습니다.

 

 

"상도야, 너는 얼굴이 깨끗하고 잘생겨서 장차 중매쟁이 신발이 닳아지지 않겠다.

그러나 신부의 부모는 중매쟁이가 나서기를 바란단다 그 은방울 같은

 구수한 이야기가 부모의 마음을 흐뭇하게 해 주거든..."

신집 부인은 이렇듯  백정의 아들 상도에게도 따뜻한 마음을 주곤 했습니다.

이렇게  백정의 아들 상도에게도 분명 행복을 꿈 꾸던 날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집은  몰락하여 신집 딸이 폭격에  죽고, ..

 '꽃신'은 정말 슬프게슬프게 끝이 납니다.

 

 

 

"인간은 살생을 해서 살아야 한다.  어떻게 보면 인간은  백정의 자식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로 생각하며 이 글을 썼다.

꽃신은 참 아름다운 신이고  예술이다."

라고 작가의 육성으로 작품의 해설을  들을 수 있어

작가와의 대화를 직접 나누는 느낌이  들어 좋습니다.

 

 

 

 

 

기념관을 찾았던 이날  열려 있던 현관문 사이로   하얀 꽃신 한켈레가  나타나더니   수줍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 통영의 꽃신을 아세요 ?"

 

 

 

 

 안으로 들어서자   하얀 꽃신 네켤레가   몇송이의 꽃을  달고  날아갈듯  나붓나붓 코를 흔들며

 백정집 아들 상도를 기다리고 있는듯 보였습니다.

 

 

 

 

 

 

 

 

 

 

'꽃신' 이야기

 

 

 

 

 

1955년  통영읍이 충무시로 승격되면서 통영의 마지막 읍장을 지낸  아버지 김채호는

기독교 신자로 매일 아침 해가 뜨기 전에 아들을 데리고 여황산에 올라  머리를 숙이고 간절한 기도를 한 후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습니다

나라가 어려운 때였지만 3남매는 통영에서 단란한 유년시절을 보내는 동안 꿈을 키워 나갔으며  훗날 세계의  무대에서 

이루어낸 업적의  김용식, 김용익 형제는  통영과 대한민국의 자랑이 되었습니다.

 

큰 아들  김용식은 1948년부터 독립한 우리나라가 직면한 여러  과제들을  해결함은  물론 , 외무부 장관을 역임하면서 

 대한민국 외교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였으며,,

 작은 아들 김용익은  바다의 땅 통영에서의  유년 시절에 보았던  기억을 소재로 삼아  영어로 소설을  썼으며  또 다시 재창작하여

우리글로 쓰는  등 '책 쓰는 모험'을 통해

세계에 자신의 작품을 알렸습니다.

 

 

 

 

 

영어로 쓴  작가의 작품들

 

 

 

 

 

 

 

 

 

 

 

 

 

지도에 그려진  '통영 가는 길'

 

서울에서 통영으로  가는 길이 서해안 (황해)를 경유 , 제주도로 돌아서  간다고  그려져 있습니다.

 

 

 

 

 

 

 

 

 

 

 

 

 

 

'The Shoses from Yang San Velley'  역시 한국어로 번역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991년  제1회 해외한국문학상을 수상한  후 , 김용익의   두 번째 한국어판 책

'씨값,"아시땅' "해녀' '상랑' '푸른 씨앗 등  5편울 수록 발행되었을 때

머리말에 통영의 한 소녀 독자가 책방에 가서 " 꽃신 주세요"  라고 했는데

"신집에 가봐라 " 는 책방주인의 대답을 듣고  돌아나왔다는  일화를 적고 있는데

소녀를 향해,  혹은 책방주인을 향해 .

"내가 꽃신을 쓴  작가요, "

라고   한마디 정도는  했을법한 상황에서  그냥 물끄러미 보고 섰다가  되돌아선

  확실히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또한 그는  베스트셀러를 혐오했으며

작가가 쓴  책중에  어느 한 권도  베스트셀러가 된 책 또한  없었습니다.

 

 

 

 

 

 

 

 

 

작가 김용익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탓에 검색을 통해 더 많은  사진을 찾아 보았지만 

  푸른빛깔의  옷을 입은 한장의  사진뿐이라   늘 아쉬웠는데

기념관에 와서   제법 많은 사진을 만나 봅니다.

 학창시절과  미국에서 활동하던 시절의  사진을  구하느라 고생 좀 했다고 합니다.

 

 

작품연보

 

세계어로 쓴 한국인의 삶과 애환

김용익의 작품은 아름다운 한국의 바다와 산을 배경으로 한국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노래한다.

한국적 토속성의 추구는 작가의 일관되고 성실한 작업이며, 한국문화의 선언이며 자부였다

김용익은  가난한 해녀와 농부 , 무구한 어린이, 걱정 많은 아낙네 , 장애인이나 낮은 신분의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하여, 한국전쟁을 전후한  가난과 피폐 ,

신구세대의 갈등, 아름답고 평화로운 한국인의 서정과

사랑을 그린다, 그의 작품은 가슴 저린 슬픔과 애달픔 , 좌절과 소외로 전개되지만

체념이나  절망으로 끝나지 않고 , 항상 인간에 대한 신뢰와 밝은 희망으로 마무리 된다.

4편의 중장편과 40여퍈의 단편소설을 통하여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사실을 작품활동을 통해 입증한  김용익은 '겨울의 사랑 (Love in Winter)에서 말한다.

 

"자 보십시오 이것이 한국입니다 나는 힘써 자랑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바로 전후 한국인의 빈곤과, 논리의 결핍과 ,부패와 혼돈입니다.

그러나 세계 도처의 어느 국가나 국민과 마찬가지로 사랑과 용기와

명예를 지닌 한국,바로 그 모습입니다."

 

 

 

 

   

 

 

마술의 펜이라는   세계의 극찬을 받은 '꽃신'

 

꽃신 <The  Wedding  Shoes > ...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일제강점기 민족의  전통말살정책과  6,25 한국전쟁의 비극을 잉태한  참 아픈 사랑을  아름다운 소설 '꽃신'에

담아 내었습니다. 상도의 슬픈 사랑이,  신집 주인의 눈물방울처럼  가슴에 맺히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소설입니다

 

 

세계가 격찬한

소설 '꽃신'은  주요섭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 등과 함께   중학교 2학년 국어교과서에 수록되어

 새드무비 같고 한편의 시같은 작품으로 중학생들이 배우고 있습니다.

 영어로 쓰인  이 작품은  미국과 유럽의  여러나라에서는  '마술의 펜'이란

격찬속에서   오래전부터  교과서에 수록되어  배우고 있었던 작품이었습니다.

       '꽃신' 은  영어로 쓴 작품이므로  우리나라에서도  영어교과서에   수록하여  공부한다면

 이 작품은 더욱 빛을 발하지 않을까 생각 해 봅니다..

 

 

참잘했어요김용식 전 외무부장관은  생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역사는 나보다 내 동생을 더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동생의 이름으로 인해 나의 이름도 거론될지 모른다"

.   그의 말은 사실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