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

조선의 어린 소녀들을 강제로 짓밟은 일본군은 사람이 아니무니다

이바구아지매 2013. 8. 14. 19:23

 

 

엉엉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로 가득 채운 집, '전쟁과 여성 인권박물관'을 찾아서...

 

 

 

 

 

 

'그림속으로 들어간 소녀 '

 

 

 

 

 

2013년 8월 10일 

서울시  마포구 성산동 31ㅡ 13 번지에 위치한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로 채운 집 '전쟁과 여성 인권박물관 ' 을 찾아갔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일본군에 의해 조선의 어린 소녀들을 취업이란 거짓 미끼를 던져 유인,

혹은  강제로 끌고가서  성노예로 만들어 하루에도 20~30명씩의 

 일본군을 상대하게 했던 치욕적인 인권 유린의 만행을 저질렀던    

  아픔의 역사를  기록, 전시 해 놓은  곳이다.

 

일제는 1905년 을사늑약을 맺어 외교권을 박탈하였고,

  1910년 8월 29일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주권을

 상실한 경술국치의  치욕인  한일합병으로 나라를 잃고 말았다. 

 이어 1932년  1월 28일 일본군이 중국 상해를  무장  침범하고  처음으로  일본군이 직접 운영한 

군위안소를  설치  1차로 한국처녀  80명 , 일본여자 24명, 등 104명을

성노예로 착취한 사실이  즁귝위 한 역사학교수에 의해 이미  빍혀졌다.

일제는 1937년에는 대대적으로 위안소를 설치 했고 그 이전에도 위안소를 설치했다고  

다소 막연하게 알려져 왔으나  최초의 위안소 설치한 구체적인  장소 및 실상이 구명 되었다. 

조선을  빼앗은 그들은 비열하고 야비한  만행을  마음껏 저질렀다. 

 

그들은 식민지 나라 조선의 어린 소녀들에게도  

 짐승처럼 달려들어 채 자라지도 않은 소녀들의  순결을  짐승처럼 짓밟았다.

당시 조선의 여자들에게서  순결의 의미는 목숨 같은  지조로 인식되던 시기였다. 

 상상도 못할  만행을 어린 소녀들에게까지  저질렀던 전범국 일본군은  

2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군에  패하자 항복했고, 따라서 이 엄청난 분노가 담겼던   

일본군 종군위안부 피해자인  소녀들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해저밑에서 웅크린채  꼭꼭 숨어 있어야만 했다.

 

  

1945년 8월  15일 조국은  해방이 되었고  68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범국 일본은 

그 잘못을 뉘우치거나 사과는 커녕 이 엄청난 일에 대해  그런 일 따위는 없었다고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럴수록  짐승같은  전범자들에게   조선의 어린 딸들이  끌려가서 당한  수모와 슬픈날의

 고통을 잊어서는 안되며   두 눈 똑바로 뜨고  확인하여 역사로 생생하게 남겨야 한다.

 

 나라가 지켜주지 못해 일어났던   소녀들의 비극 ,  

조국의 광복과 함께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도 겨우 목숨 부지하고  돌아온 고국에서는  

전쟁의 희생물이 되어버린  소녀들을  감싸안아  위로 해 주고   챙겨주는  일  따위는 없었다.

 돌아온 소녀들은  상처뿐인 몸과 마음을 치유하지 못해  성장마저  

멈춰버렸고 ,고통의  트라우마를  벗어 던지지 못한채  

 액자속의 그림속으로 들어간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다.

 

다시 8월이다.

 조국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광복의 달을 맞아

 나라 잃은 백성이 당하는 치욕이  어떤 것인지 , '전쟁과 여성 인권박물관'으로  가서 우리의 어머니,

할머니가 어린시절 짓밟혔던  아픔과 수모를   역사의  진정성을 살린   생생한 기록으로

 확인하며 어린 딸 가나에게 들려주고 보여줄 생각이다.

 

서울은 연일  가마솥 더위가 늑대처럼 달려들고 , 

 서 있기만 해도  화딱지가 나서 미쳐버린파닭(양념통닭)이 될 지경이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붉은 혀를 낼름거리며    지금  내가 걷고  있는 마포구 성산동 월드컵북로 11길

가로수로 내려 앉았는지   몹시  헐떡이게 한다.더위를 피해 아침부터  출발하였지만  여전히

핫핫거리는 불볕더위는  염천할  더위속으로 몰아 넣어

   도착할즈음에는 지쳐   할딱거리게 만든다.

 

''전쟁과 여성 인권박물관'은  비스듬하게 경사진 동네의 누군가네 집처럼  

까만 벽돌집이 단단한  모습으로 우리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건물의 까만 벽면에는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오래전 소녀였던  할머니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건네는  한줄 글들이  노란색의 나비로 태어나  팔랑이며 정겹게 다가온다..

옹글옹글 모여든  노란 나비떼를  찬찬히 들여 다 보니  뜻밖에도 양심있는 일본인의 글도 있다. 반갑다 무척,

 그런가 하면   아랍계 사람들의 글도 있다. 고마운 흔적, 고마운 발걸음들.

 

지구촌 곳곳에서 이 슬픈 비극의 소식을 메스컴을 통해 전해 듣고  찾아왔는지

 아무튼  그들이 남기고 간  흔적들이 소담스레 까만벽에 달려 있어 함깨  공감하는  마음을 읽고  가슴 찡해 온다. 

국적을 불문하고 찾아와서 희망의 한마디를  놓고 간 벽의 공간에는

'함께 외치는 함성' 이라는 문구가 적힌 플렌카드가 단정한 소녀처럼  걸려 있다.

 

  '함께 외치는 함성'을 한참동안이나 넋을 놓고   들여 다 보다  이번에는 고개들어  까만색 2층집을  올려 다 본다.

까만벽돌을 정성껏  쌓아 2층 높이로  지은  이 집은  마치 누군가가 살고 있어 2013년  8월이 무지  덥다고 

창문  활짝 열어 놓고  앉아 책을 읽거나  커피를 마시거나 혹은 게으른  아침잠을 즐기는  풍경을 하고 있다.

고개 들어 하늘을 올려 다  보니  까만색을 유별나게 좋아하는 집주인이 까만집에 어울릴만한  간판을

 작고 예쁘게 디자인하여 장식하듯 걸어놓은  그러니까 분명 이 집 주인은  능소화 꽃을 좋아하고  

 벽한모서리도  단정하게 꾸밀줄 아는 감각적인 여성이 아닐까?

 

 벽돌집의 1층 꼭대기쯤에  해당하는 높이에다  예쁜  소품처럼   걸어놓은 

  전쟁과 여성 인권박물관 .이란 작은 간판하나  대롱 대롱 ...

'아하 그렇구나 '

그러니까 이 집에는 오래 전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어린 딸들이  (10~20세 가량의 조선 처녀)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서 

 성노예가 되어 고통을 감내해야했던  고통의 시간조차 하마트면 영원히 역사가 되지 못하고 묻히고 말았을뻔했던

 아찔한 순간에 있었지만   

 용기있는 한 할머니의 당당한 증언을 시작으로  숨어버린  역사를 조금씩  찾아내어  기록으로 남기게 되었다

 

1991년 8월14일 故  김학순 할머니의 

 '나는 일본군 위안부였다 '

라고  위안부 피해자들의 산증인이 되어  인권운동가로 변신, 일본을 향해  외쳤다.

 22년전의 일이다. 

 그날도  오늘처럼

햇빛이 콕콕  쏘는 8월이었다.

 

 

 

 

 

 

 

일본군 '위안부'란?

일본군 '위안부'란 일본 정부와 군의 통제 감독 아래 징집 이송되어  군이 개설, 운영 ,

통제 관리하던 군 위안소에서 강제로  성노예가 되었던  여성들이다.

조선인,대만인, 중국인, 인도네시아,필리핀인  등 일본의 식민지와 점령지 여성 외에

소수지만 네덜란드와 일본 여성도 있었으며

위안부 피해자는 대략 20만 여명 정도로 추산된다.

 

일본군 위안부 '성노예'?

위안부는 당시 일본 공문서에서도 등장한  아시아권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문제의

 본질인 군대에 의해 강요당한 성폭력을 감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일본군에서 자행했던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우리나라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라는 말을 널리 사용하고 있다.

 

 

'  함께 외치는 평화 '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어린 소녀들이 겪었던 아픔, 당시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갔던

소녀중에는 가나처럼 어린  소녀도 있었다.

소녀들은 가족들의 옷을 빨러 갔던 빨래터에서, 언덕에서 나물을 캐다가, 

 언니와 동생이 영문도 모른 채 함께 끌려가기도 했고 , 

 휘영청 달 밝은 밤에  홀로  누워  달을 보며 뒤척이고  있다가 귀신에 홀린듯  잡혀가기도 했고

  소학교 졸업 후  일본인 담임선생의

추천으로 일본의 공장에 갔다가 일본군에 의해  납치되어  끌려가기도 했다. 

 

조선의 어린 소녀들을 생각하는   이순간만큼은 어린 가나도  덥다고 짜증을 내거나  투정을 부리지 않는다..

아직 학교에서 '일본군 종군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에 '  관련해서   배우지는  않았지만

 누구보다 일찌감치 일본군 위안부가 어떻게 생기게 되었는지 과정을  잘 알고 있다.

이미 몇차례  위안부 관련 여러행사와 집회에  참여,  보고 들은 상식도 풍부해졌다.

 

 

 

 

'전쟁과 여성 인권박물관'

 

전쟁이 일어나는 순간  여성의  인권은 하루 아침에 말살되고 만다. 

잠깐 잔쟁을 생각하자 순간 귀에서 바람소리가 쌩쌩 나고 가슴이 먹먹해진다.

 

 

 

★조선의 딸, 어여쁜 소녀야...

 

끌려갔던  소녀는  일본의 만행을 어제처럼 악몽으로  기억하고 있다.

 

 

★2013년 8월10일  별세한 일본군 종군위안부 피해자 이용녀 할머니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일본정부로부터 사과 한마디 듣지도 못했는데  

죽음이 달려들어 또 한 할머니를  훌쩍  모셔 가고 말았다.

이제 위안부로 정식 등록된  236명중  57분이 생존해 계시지만

이중  건강이 좋지 않은 할머니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일본정부로부터 꼭 사과를 받아내야  한다고  세상을 향해 끝없이 외쳤던  故 이용녀 할머니...

이할머니깨서는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이라고 외치셨다. 그러나  끝내 일본정부로부터

' 미안하다. 용서를 빈다.'

라는 한마디조차  듣지 못한채 안타깝게도 8월10일 새벽에 운명하셨다.

 

 

 

 

 

 

 

 

사진의 내용은 '100명 여성의 증언'

 

일본군의 범죄를 처음 공개적으로 증언한 용기있는 故 김학순 할머니의

모습이다.

 

 

 

 

 

 

오랜시간 위안부 문제는 국내의 양식있는 학자들조차 '치부'로 여기며 드러내질 않았지만

1991년 8월14일 故 김학순 할머니에 의해 처음 증언을 시작으로 국내는 물론

국외에서도 피해자들의 증언이 이어지면서 전세계적인 관심사항이 되었다. 

이후  일본대사관앞 '수요집회'가 시작되었고  한일 관계의 뜨거운 감자 내지 시한폭탄이 되었다. 

김할머니께서는 증언을 통해

"역사는 반드시 영웅호걸에만 의해 변화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나는 서럽지 않은 조선의 딸로 살고 싶었다"

라고 외쳤으며

그리고

"역사에 남기기 위하여...세계 모두에게 일본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

수치심을  억누르고  '용기'를 내셨다고 했다.

 

 

(참고자료 ,김영한의 블로그)

 

 

 

 

일본군 ' 위안부'  이야기는 

68년전  일본군이  저지런  파렴치한 만행으로  조선의 어린 소녀들을 무참히 짓밟고 인권을 유린한 세계사에 없었던 참혹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엄청난 범죄를 저지른 전범국 일본의 만행을 지구촌 사람들은 대부분 모르고 있다.

소녀들은 이제 할머니가 되었고  , 할머니들은 하나, 둘 고통을 안고 세상을 떠나고  있다.

 

 일본군에 의해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국가적 범죄를 전 세계 인류의 이름으로 규탄해야 한다.

 

 

 

'노란 나비들의 아름다운 외침 '

 

 

 

 

 

 

 

 

 

 

 

 

 

 

 

 

 

 

 

 

 

미디어' 몽구'님께서 트위터로 모금하여 구입한 것으로  알려진  '희망승합차 '

 

 

 

 

 

 

 

 

 

 

 

할머니들께 평화는 언제쯤  찾아 올까

 

 

 

'당신들을 응원합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할머니들을 응원하는 소리가  들리는듯.

 

 

 

 

 

 

 

 

 

 

 

 

 

 

 

초록의 계절과  솟대가 지키고 있는 공간

 

 

 

 

 

 

 

 

 문은 굳게 닫혀 있다.

  나 먼저  '전쟁과 여성 인권 박물관'다녀간 블로거의 글을 읽으며 기억하게 된 저  문을 열고 들어가서

세상을 향해 살려달라 절규하는 소녀들의 목소리를  두 귀로 똑똑히 들어야하는데 ...

 

 

 

 

이 까만색 건물안으로 들어서면

가나처럼 어린 일본군 종군위안부 피해자 소녀들이 위안소에서 겪었던  처절한 고통을 

함께  아파하며 만나 볼 수 있었을텐데

오늘은  그저 상상해 보기로 한다.

집에서는 가나와 함께  김준기 감독이 3년에 걸쳐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  '소녀 이야기'를 애니메이션으로

  수십번을  넘게 보았다

'소녀 이야기'는 이미 고인이 되신 경북  칠곡의  정서운 할머니께서

'인도네시아 자바섬으로 끌려갔던 당시를 

마치  옛이야기하듯  담담하게 들려주어  

 울림이 컷던 작품이었다.

 

 

 

'전쟁과 여성 인권박물관'

  제 30회 서울시 건축상을 받았을정도로 뛰어난 건축물이라고 한다.

 

 

 

 

400km의  먼길을  달려왔는데  지금은  들어 갈 수 없는 육중한 문이 가로 막혀 있다.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에서 도둑의 소굴을  향해 문을 여는 주문으로 '열려라 참깨' 를 외치던 것

 처럼 아무리 외쳐도 문은  열리지 않는다.

 

 

 

불행했던 소녀들이 온몸으로 증언해준  내부의 모습을  보지 못한 안타까움 어쩔 수 없이

먼저 다녀 온 사람들이 전해 준 내용으로 대신 들여 다 보는 수 밖에...

 

 

 

 

누군가는 이 슬픈 집에서 만난  위안부  소녀상의 손을 따스하게 잡아 주었다고 한다.

 

 

 

<사진출처, 어느 블로그에서 내부사진은 가져왔지만 기억이 잘 안남>

 

 

 

" 그 놈들 한 걸 생각하면  보상이라는 것으로도 한이 안 풀린다"

 

" 내가 바로 살아있는 증거인데 일본정부는 왜 증거가 없다고 합니까?"

 

" 온 세계 사람들이 우리가 겪은 일을 다 알았다면  좋겠어"

 

"그걸 다 기억하고 살았으면  아마 살지 못했을거에요."

 

 

<일본군 종군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증언중에서>

 

 

 

 

 

 

끌려가는 소녀 (김순덕 할머니)

 

 

 

왜 이렇게 갑자기 서늘한 기운이  느껴질까 ? 

소녀들이 끌려갔던 이역만리 타국의   밤은  또 얼마나 무서웠을까...

 

 

★ 조선의  어린 소녀들에게 고통을 안겨 준  일본군은 사람이 아니무니다

 

일본군 종군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 '이 아프게 다가온다.

나도 여자이며,  내 딸들도  여자이기에 .

내 어머니, 내 할머니가 모두 여자이기에  더더욱 절절하게 새겨진다.

 사랑이 없는 적국의 몰지각한 병사들과  하루에도 수십번에 걸쳐 성행위를   강요당한  일상

그 통증과, 치욕과, 모욕을  어떻게 견뎌 낼 수 있었을까?

오호 가엾고 불쌍한 조선의 소녀들이여...

 

세계인은 히틀러가 유대인을 학살한   전쟁의 잔학성은  빠짐없이 다 알고 있지만 ,

정작 어린 여자 아이들이 전쟁터로 끌려가서  일본군에 의해  날마다 죽음같은 강간을 오랜시간 조직적으로 당했던

조선의  어린 소녀들에게 벌어졌던  치욕적인 만행은 대부분  모르고 있다.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토크쇼의 여왕인 오프라 윈스키도  어린시절  성폭력은 당했다고 솔직하게 털어 놓아

당당한 여성이 되었다. 

우리도 일본군 종군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박탈당했던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시켜 드리기 위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알때까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소녀 이야기를 함께 외쳐야 하지 않을까?

비극의 역사, 소녀들의 희망을 송두리째 앗아간  시간을 치유해 드리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우리의 슬픈 역사를 기록하고 세계에 알려야 할 의무가 있다.

 

'

 

아직 끝나지 않은 그들의 전쟁 

 
지금도 매주 수요일이 되면 할머니들은 일본 대사관을 찾아 사과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열리는 일이 없는 굳게 닫힌  철문을 향해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과연 끝이 있기는 한것인지도 알수 없는 할머니들의 마지막 외침은  계속되고 있다.

 

 

엉엉8월 14일 , 오늘은  위안부의 날입니다.

 

 

 

 

 

                                       故 이용녀 할머니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