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도 한 바퀴

거제도 둔덕골, 그곳에 가면 언제나 시인 청마의 향기가 넘쳐난다

이바구아지매 2013. 7. 4.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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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청마의 향기로 여름코스모스를 노래하자

 

 

유월을 보내는  마지막 휴일, 아침,

  잿빛  하늘이  당장이라도 비를  뿌릴듯  무거워 보이는 날,

시인의 마을 둔덕골 방하리에서   펼쳐지고 있는  여름코스모스 축제가  아름답다는  소식을 듣고

꽃구경에 대한 예의로   고양이 세수를 하고   길을 나선다.

   

 차를 타고  시인의 마을  방하리로 가는 동안   차창으로 나타나는 초록들판이 시원하게  스케치 해  놓은  화가의 풍경화같다.

거제도 둔덕골은  고현시내에서 출발하면 고작  30분 거리지만  학교가듯 혹은 출근하듯   걸음하기란  쉽지 않은 동네이다.

벌써  6일째  방하리에서는  '청마들꽃축제' 가   폼나게 열리고 있다는  소문이 시시각각  들려왔다.

지난 25일 개장한  청마꽃들 축제에 대한 관람객들의 반응이  좋아

그곳을 다녀온 사람들은 모두가  하동 북촌 코스모스축제보다  훨씬 더 낭만적으로  아름답더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방하리를 다녀온  지인들은   다투어 카스 혹은 카톡으로  여름코스모스를 아름답게 담아  전송 해 주었는데 

꽃들의 물결이  영상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1인  미디어들은 소소한 일상조차  자신의   블로그, 페이스북 ,카톡, 트위터, 카스 등으로  정보를 실시간으로 제공

천리, 만리 공간을  순식간에 점령,  전파하는 놀라운  세상을 실시간 경험한다.

눈과 귀의 확장,  증강강현실을 마법처럼  활용, 경험하며  현실과 가상세계를 고루 접하며 사는 e세상이 얼마나  신기한지...

 

게다가 과연 사계절  축제의 도시라는  슬로건에 걸맞게 ' 여름코스모스 축제'.라니 , 역시 거제답다.

부지런한 거제시  봄에 일찌감치  여름코스모스를 심어  둔덕골  방하리 4만5천평 규모의 들녘에 코스모스의 물결로  장관을 이루었다.

거제시는 다른 지역에 비해  예로부터   꽃을 많이 심는  고장으로 유명하다.

' 청마들꽃 축제'  또한 그 좋은 예로

생각지도 못했던 여름꽃  축제를 보게 되었으니  

 밋밋했던 유월의 끄트머리에서 꽃과 시인을  만나는 설레임,  이렇게

기분좋은  유혹을 마다할리 없지 않는가?

 

   

 

 멕시코가 원산지로 알려진 코스모스, 우리말로  어학사전에   '살살이꽃' 으로  올라 있으며,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가누지 못해   살랑거리는  모습을 보고 지은 이름같다.

 코스모스가 우리말로 살살이꽃임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신이 맨 처음 만든 꽃이라는 영광을 꿰어찬   코스모스는   애잔하고 가녀린 이미지로

, 특히 청순가련형의 여성에 비유되며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꽃으로 남성들은 물론이거니와 

 날씬함과 청순가련형을 선호하는  수많은 여성들로부터  아낌없는 사랑을  받는  꽃으로 알려져 있으며

  무리지어 어우러짐의  아름다운 자태는  보는이로 하여금 애잔한 감성을 자극한다.

 

최근 지켜보니   4월부터  꽃이  피기 시작하더니   5,6월에는  이미 활짝 핀 코스모스를 심심찮게 보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가로수밑,  언덕배기  그리고 빈 공터에서 한들한들   봄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한   코스모스는  여름코스모스였다.

가을을 상징하는 꽃으로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꽃은 가을코스모스라고 한다.

   왜 우리는 지금껏  코스모스라면 무조건  가을의 꽃으로  기억하게 되었릏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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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살이꽃이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가녀린 모습으로 파도를 탄다.

 

 

 

 

유월의 유혹 여름코스모스 ,

우리말로 살살이꽃,  분명 어학사전에도 올라 있지만  살살이꽃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는듯

 

 

 

 

 

 

 

 

 

오랜만에 만나는 돌담 쌓아 만든 논둑길

누가 방하리를 꽃밭으로 만들자고 제안했을까? 궁금했는데  거제시장님(권민호)의  아이디어란다.

 

초록빛 들녘에는  가을을  향해 가는   벼들이  성큼성큼 키를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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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살이꽃

 

 

 

 꽃보다 사람

 

 

 

베너 깃발 ,  청마들꽃,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의   '깃발'

둔덕詩골애서 열리는   축제라면  무조건 '청마 ...로  시작한다

 

꽃을 사랑했던 시인 '청마' 살아서 이 모습 보았다면 당장 '살살이꽃' 을 노래하였으리

 

 

 

 

풍차도 있고 .

 

 

 

 

 

예쁜아가도  찰칵

 '청마들꽃' 과 함께 아이의 엄마가  추억을 만들어 주느라  연신 바쁘다

 

 

 

 산방산이   둔덕골을 내려 다 보며 미소를 보낸다.

산방산은 여자를 상징하는 산 으로 알려져 있는데 과연 그리 보인다.

그래서인지 시인 청마가 사랑했던 여인들은   청마의  시를  샘솟게 해 준 샘물같은 존재였다고...

 

 

 

 

 

 

 

 

 원두막과아이들

꽃도 아이들도  좋아서 까르르  ...

 

 

 

 

 

 

 

 

 

 

 

여기서 만난  두분깨서 빨강머리앤을 위해   몇장의 사진을  찍어 주었다.

 

 

 

길가에 늘어선 전봇대도 여름코스모스 물결에 좋아서 싱글벙글

 

 

 

 

 

이 길을 따라 가면 산 언덕배기로 청마의 묘소가 나오고

시인은 죽어서  8대조가  묻힌 땅  둔덕골로 돌아와 선영에  조강지처와 함께  누웠다

 

 

 

 

 

 

하늘은 잔뜩 흐려있지만  후덥지근  더워서 꽃을 구경하던 사람들은  그늘막에 들러  잠깐  쉬었다  가는 곳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하고 거울을 만들어 세워 둔 곳도 있으니 이곳에서라면  누구라도  백설공주가 되어보는 즐거운 시간이 된다.

 

 

 

방하1길 ,  둔덕골  집집이  대문가에는 청포도가 주렁주렁 매달려 익어 가고,

 

 

청마생가로 가는  골목길을  따라 걷다  보니  무성한 들풀속 개망초와  하얗게 새어버린 피비군락이  바람을 타고  몹시 흔들리고 있었다. 

 

 

 

'사랑해    2) '깃발'과 사랑의 시인 , 청마 유치환

 

 

 

청마가념관 앞

 

통영에도  없는 둔덕골의  '청마우체통,'

이영도여사가 무려 20년간  받았다는  연서 5천여통과  변희정여사가 3년간 받았다는  350통은  못되더라도

이곳에서라면   아날로그 방식의  과거로   돌아가서  손편지 한통   써 보자

보낼곳이  마땅하게  떠오르지 않는다면

'나에게로 보내는 편지' 는  또 어떨까?

 

 

 

 

 

깃발 / 유치환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길게 드러누운 시 청마의 '거제도 둔덕골 '과 서 있는 시인 청마

거제도(巨濟島) 둔덕(屯德)골

유치환

 

 

거제도 둔덕골은

팔대(八代)로 내려 나의 부조(父祖)의 살으신 곳

적은 골 안 다가솟은 산방(山芳)산 비탈 알로

몇백 두락 조약돌 박토를 지켜

마을은 언제나 생겨난 그 외로운 앉음새로

할아버지 살던 집에 손주가 살고

아버지 갈던 밭을 아들네 갈고

베 짜서 옷 입고

조약 써서 병 고치고

그리하여 세상은

허구한 세월과 세대가 바뀌고 흘러갔건만

사시장천 벗고 섰는 뒷산 산비탈모양

두고두고 행복된 바람이 한 번이나 불어 왔던가

시방도 신농(神農) 적 베틀에 질쌈하고

바가지에 밥 먹고

갓난것 데불고 톡톡 털며 사는 칠촌(七寸) 조카 젊은 과수며느리며

비록 갓망건은 벗었을망정

호연(浩然)한 기풍 속에 새끼 꼬며

시서(詩書)와 천하를 논하는 왕고못댁 왕고모부며

가난뱅이 살림살이 견디다간 뿌리치고

만주로 일본으로 뛰었던 큰집 젊은 증손이며

고향 마을의 정경과 친척들의 삶의 모습

그러나 끝내 이들은 손발이 장기처럼 닳도록 여기 살아

마지막 누에가 고치 되듯 애석도 모르고

살아 생전 날세고 다니던 밭머리

부조(父祖)의 묏가에 부조(父祖)처럼 한결같이 묻히리니

고향을 벗어나지 못한 운명

아아 나도 나이 불혹(不惑)에 가까웠거늘

슬플 줄도 모르는 이 골짜기 부조(父祖)의 하늘로 돌아와

일출이경(日出而耕)하고 어질게 살다 죽으리

고향에서 농사지으며 살고 싶은 소망과 의지

 

 

 

 

 

청마와 부인  권재순여사

 

청마는  결혼전  부인이 될 권재순여사에게도   수 많은 편지를 보냈다고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픗픗하게 아름다웠을  지고지순한 사랑의 편지는 한통도 전해지지 않는다.

 

 

 

청마의 창작의 원천이 되어 주었던  두 여인 '이영도와 반희정 '

 

 

이 귀한 두장의 사진은  청마 기념관 에서  용케 찾아낸 것으로  왼쪽 위의 사진은

'살구꽃 피는 마을,' '개화 의 시조시인 이호우의 시비를 찾아간 날 '

시인 청마와 이호우시인의 동생  이영도여사가  문인들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이며 ,

오른쪽 흰색 가운을 입은 여인은  청마가 대구여고 교장으로 재직시  동료교사였으며

청마로부터 3년간 연서를 받았던  두번째 플라토닉한 사랑의  주인공 '반희정' 여사이다

 청마가 불의의 사고로  죽자 청마사후 한달만에  이영도여사는 시인 최계락의 도움을 받아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 1967 , 중앙출판공사)를   세상에 내 놓았다  이 책은  출판되자마자 불티나게 팔려

베스트셀러로   당시 2만5천부가 팔려 나갔으며,  연애의 참고서, 혹은 연애의 필독서로  생각한

젊은이들로부터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그로부터 3년 뒤  이번에는  '청마와 사색의 그림자'(1970, 현암사)를  반희정여사가  세상에 내놓았다.

하지만  '반희정'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청마와 이영도여사의  숲에 가리워져  잊혀진  존재가 되고 말았다.

 

연애가  문학속에 스며들어 ;자유연애'를 부르짖는  풍경과 만나게 되었던

1920년대 ,

예술이냐 연애냐 로 청마역시 혼돈을 겪기도 하였을 것이다.

 

 

 

 

 

대답해가고 돌아오지 않는   아름다움 ,,,청마의 마지막 일기 (1967년 1월12일)

 

 

 

엉엉그 후 3년이 지나갔다 ... 반희정  편 ''청마와 사색의 그림자들'(1970년 현암사)

 

 

 

 

 

참 많은 편지를 보냈던 시인   두여인에게 보넸던 편지를 합하면  5천3백 5십통

그중 이영도여사에게 보낸 편지가  20년 동안  무려  5천여통으로   

사과상자  3상자  분량이었다고 한다..

청마는 이영도여사와  연서를 주고 받으면서 훗날

 대구여고에 함께 근무했던  양호교사   뱐희정여사에게 3년동안 350여통의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아무리 플라토닉한 사랑이었다 하더라도  두여자에게로 동시에 향했던 사랑을  어떻게 이해할까?

특히   반희정여사의 출현으로 이영도여사가 겪었을  심적 부담은  또  얼마나 컸을지....

이런 관계를 요즘의 시각으로 본다면 문학도   핑계처럼 보이며

다소 불륜처럼 보여지기도  한다 .

하지만 청마사후 이들의  정신적인 교감을   품격있는

 문학으로 승화시켰다.

여기서 정신과 육체를  분리시키켜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맞지 않는  언어도단이며  

아이러니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청마는 과연 연애를 예술로 발전 , 고양시키고자 노력하였을까?

조강지처 권재순여사는  또  남편 청마의 시심을 샘솟게  해준 두여인들에게 과연  한없이  고마워했을지...

 

 

 

 

청마는 김춘수와 여러  문인들의 편지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오랜시간

청마는   일방적으로 보내는  편지를 썼던  것이 아니라  주고 받는 편지를 썼다고 한다.

 그렇다면   청마가 두사람으로부터  받았을법한  그 많은 편지는 다 어떻게 되었을까?

짐작으로 받은 편지 또한 6천여통에  가깝지 않았을까?

청마는 편지를  귀하게 여겨 애지중지  잘 보관했으리라  추측하지만  두 사람으로부터

  받았다는  그 많은   편지의 행방은 현재  묘연하다.

 

 

 

 

 

 

청마생가 ,

아담하고 포근한  초가집  거제시 둔덕면 방하리  507~5번지  청마의 출생지

 

 

츨생기 / 유치환

 

 

 

검정 포대기 같은 까마귀 울음소리 고을에 떠나지 않고

밤이면 부엉이 괴괴히 울어

남쪽 먼 포구의 백성의 순탄한 마음에도

상서롭지 못한 세대의 어둔 바람이 불어오던

융희(隆熙) 2년 !

그래도 계절만은 청년을 다채(多綵)하여

지붕에 박넝쿨 남풍에 자라고

푸른 하늘엔 석류꽃 피 뱉은듯 피어

나를 잉태(孕胎)한 어머니는

짐줏 어진 생각만을 다듬어 지나셨고

젊은 의원인 아버지는

밤마다 사랑에서 저릉저릉 글 읽으셨다

왕고모댁 제삿날밤 열나흘 새벽 달빛을 밟고

유월이가 이고온 제사밥을 먹고나서

희미한 등잔불 장지 안에

번문욕례(煩文辱禮) 사대주의의 욕된 후예로 세상에 떨어졌나니

신월(新月)같이 슬픈 제 족속의 태반(胎班)을 보고

내 스스로 고고(呱呱)의 곡성(哭聲)을 지른 것이 아니련만

명이나 길라 하여 할머니는 돌메라 이름 지었다오

 

 

 

      1

초가 두채,싸리대문, 텃밭, 장독대, 우물 등 청마가 태어났던  1908년  옛모습을  그대로 복원했다.

 

 

 

 

 

 

 

 

 

 

 

청마 우리곁에 부활하다

 

 

청마유치환의 시세계

허무를 극복하려는 남성적 의지적인  시향으로 사람의 삶 어디에나 있는 뉘우침,외로움, 두려움, 번민등의  일체로부터

벗어난 어떤 절대적인 경지를 갈구하였으며  그 해결의 길을 일체의 생명적인  것에 대한 허무주의와 지각에서 찾고자 했다

 

유작으로  청마시초, 생명의 서 , 울릉도, 청령일기,청마시집  등 13권의 주옥같은 시집을 남겼으며  특히

'깃발'을 비롯한 작품의 소재를 청정해역  천연의 절경을 간직한  거제의 모습을 담았으며, 또한

사랑과 행복을 끝없이 노래한 시인이었다.

 

 

 

 

 

 

 

 

 

 

 

 

 

 

청마기념관 옥상 전망대에서 ...

 

 

팽나무 아래 앉은 사람도 시인을 생각하고 있을까?

 

 

 

 

 

수령 350년된  방하리의 팽나무는 콩알만한  푸른  열매를 을 가득 매달고 푸른 그늘을 만들어 준다

우리지역에서는 포구나무로 부르며 나무에 달린 열매를   따서 

 새총에 끼어 쏘아  맞히는 놀이도 하고 놀았다.

가을이 되면  주황색으로 익은  열매는 단맛이 나 아이들을 불러 모으는   맛있는  나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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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하마을

팽나무 아래서

 

 

거제도 둔덕골 사람들은  이 팽나무 아래서  언제까지나  마을을 이야기하고, 

꽃을 이야기하고,시인을 이야기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