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도 한 바퀴

초등학교 3.4학년 미술교과서로 만나는 소와 목동의 화가 양달석

이바구아지매 2013. 7. 19.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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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 소나기는 밭고랑을 두고 다툰다'

'여름 소나기는 콧잔등을 두고 다툰다'

라는 속담처럼

여름 소나기는 걸핏하면  비를 쏟는다.  

비를 뿌리는  하늘을 향해   한마디의 넋두리를  쏘아 올리며    

코발트색  우산을 챙겨  집을 나선다.

작년 이맘때처럼  잊지 않고

소와 목동의 화가 여산 양달석선생의 흔적을  만나러 사곡삼거리의 작은 공원으로  간다.

 슬픈 가족사와  평생 가난을 달고 살아야했던 

 목동화가 양달석의 흔적을 다시 찾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달리는  차창으로 내다 보니  초록의 들녘으로  흐드러지게  피어난 개망초가 무리지어 새하얗다.

 칠월의 태양은 어느덧  팔월을 향해 기울었다.

    

 

 고현터미널에서  통영방향으로 차로  5분 남짓 걸리는 가까운 이곳은  

 사곡삼거리 버스정류장 뒷편으로 소공원이  있는데 여름이라  

  잡초 우거진 풀밭으로 변해버린 이곳에  내가 찾는   

 '여산 양달석 화비'가  하늘을 향해 날렵하게 서 있다.

소공원으로 불리는 10평 남짓한 작은 풀밭에는 여산 양달석 선생의 

 '소와 아이들'의  그림이 화강암에 옮겨져 있는 화비가 우뚝 솟아

 모래실  앞바다를 내려 다 보며 정답게 서 있고, 

조금  옆으로는  진주 촉석루, 양산 통도사,밀양 영남루  통영 안정사,

고성 옥천사 등의 현판을 쓴 영남제일의  

서예가로 알려진 추사체의 대가  성파 하동주선생의 송덕비가 서 있다.

하지만 서예가 하동주 선생의 공적은  다음 기회에 다시 논하기로 하고

오늘은  작은  풀밭에서  소와 목동의 화가로 알려진  양달석 선생의 화비를 만난다.

 

 

 

 

 

 

★ 사곡삼거리 소공원에 있는 '여산 양달석 화비 '

 

   

선생의  화비는  2002년 12월 30일 건립되었지만  

이 곳을 기억하고 찾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사곡삼거리에서  통영방향으로 한정거장 더 가면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마을인 성내가 나타난다..

 

 

★소와 아이들

 

가난했던 날 우리들의  수채화 ...

 

화비 앞면의 하단에는 양달석 선생이  즐겨 그렸던 소재인    

소와 아이들로  

소의 품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천진난만하게 잘 묘사되어 있다.

  이그림속 이야기는  가까운 옛날  

 소와 함께였던  우리들의  일상을 따뜻하고 정감있게 나타낸 행복한 그림일기이며

소는 아이들의  어리광을 끝없이 받아주는 자상한  엄마 같다.     

 소의 가랭이 사이로 기어  들어가  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니  저절로 웃음이 난다. 

 소와 어울려 놀았던 나의 유년도 양달석 선생의  그림속  소와  아이들이었다.

그림속의 소는 콧김을  내뿜는 것도 같고 ,  코뚜레(소의 코청을 꿰뚫고 거기에 끼는 고리 모양의 나무)

가 찔러서  불편하다고  씰룩거리는 것도 같다.  

  아이들은  소의 품에서 깔깔대며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어둠이 내릴 때 까지 놀았을테고

갑자기 소나기라도  쏟아지면  소의 품으로 기어들어 오종종 모여

앉아 비가 멎을때까지 키득거렸을게다. 

 

그림속  소의 코앞에는 실제로 소가 좋아하는 개망초가 지천으로 피어나서 소를 유혹하는듯 보인다..

소는 코뚜레를  씰룩거리며 혀를  낼름 내밀어 순식간에

 개망초를 후리칠 기회를 엿보고 서 있는듯 ,

 . 그림속의 소와 

개망초무리의 조화를 보니 놀랍게도  사실적으로 보인다.

 

아이들은 조잘대며 놀다가도   소가 꼬리로 흔들고 발길질을 해대면   배, 허벅지,다리 

 혹은 꼬랑지에 붙은 까분다리(진드기)로 가려워서라고  얼른 눈치채고 

까맣게 윤기나는 열매같은 까분다리를 톡톡 따 주었을 것이다.

 소는 가렵던  곳이 시원해지니 좋아서  음매음매 하며 왕방울  두 눈을 끔뻑거리지 않았을까?

농촌에서의 소는 영화 '워낭소리' 처럼  실제로 가족이었다.

 

화가는 대부분의 그림을  소와 목동을 주제로  목가적이고 동화적인 색채로 따뜻하게  그렸다 .

실제로 양달석 선생은 어린시절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큰댁에서

 16살이 될 때 까지  소를 돌보는 목동이었다고 한다.

 소와 함께했던 유년의  시간을 그림의 모티브로 삼아 그린 그림의 대부분은 소가 등장하여 

'소와 목동의 화가'  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 다니게 되었다.

 

 

 

초등학교 3,4학년 미술교과서에 나오는  '나물 캐는 소녀 '

몽실몽실 그려진 나물 캐는  소녀들과  여인들의 모습은  몹시 가난했던

시절을 연상하기 보다   살림살이가 제법

풍요한   평화로운 시절로  보인다..

풍요와 평화는 화가의 진정한  바램이지 않았을까? 

  

학교에서 돌아 온 가나가   이 그림을 보며   물었다.

"엄마, 이 그림 제목 알아?"

"아니 몰라 "

"  나물 캐는 소녀 "

"대단해요  어떻게 알았어?"

" 초등학교 3,4학년  미술교과서에  이 그림  실려있어 

소와 목동의 화가 양달석, 화가의  고향은 엄마랑 가나가 살고 있는 거제랍니다  ... "

"

 

 

 

 

 

 

  소나기가 또 한바탕  비를 뿌린다. 

 

 

화비의  뒷면에는 상벌과 화비가 세워진 연대를 새겨 놓았다.(2002 12 30)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여산(黎山)양달석 (1908~1984)

 


 거제시 시등면 사등리 성내마을에서 아버지 양우유와 어머니 신씨 사이에서

 1908년 10월18일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은  아버지를 일찍 여윈 탓으로 큰집에서 머슴을  살았다.

 유년시절은  고달팠으나 그 특유의 끈기와 인내심으로 버티어 냈다.

 학교 교육은  16살  때  (1924년)매형의 협조로 통영사립강습소에

입학하여 현대식 교육을 받게 되면서 부터였다.

 그 후 진주공립농업학교에 다닐 때 가난하여 학비를 마련할 길이 없어

 그림을 팔아 보충하기도 하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그림에 정진하였으나 더 이상 발전이 없어 아내와

자식을 처가에 맡기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제국미술학교

서양학과에 입학하여 고학으로 그림활동을 계속하였으나

 몸이 쇠약하여 고향에 돌아와 1935년부터 3년간 사등면 면서기를 하였다.

그 후  부산으로 이주하여 초상화를 그리면서  공장에서 잡부 노릇도 해 보았지만

다섯 식구가 살아가기에는 너무 힘들었다. 다시 일본에 건너간 선생님은 도쿄공업기술학교 제도과에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직장 생활과 그림활동을 계속하던 중 해방이 되어 조국으로 돌아 왔다.

그 길로 동생에게 맡겨둔 유화 20점과 수채화 20점이 걱정되어 거제를 찾았다. 그러나 유화작품은 불태워지고

수채화는 벽에 도배지로 사용된 후였다. 부산으로 올라온 선생은 경남공업상업고등학교에 미술교사로 있으면서

작품활동을 계속하고  경남의 미술발전에 기여한 공로가 인정되어 문화상을 받았다.

서양화가 양달석은 ‘소와 목동’의 화가로 수많은 미술전람회 그리고 36회에 걸친 개인전을 열었고, 부산 미술협회

지부장과 문총지부장을 지냈으며 그림생활 50년 동안 2,600여점의 그림을 그렸고 1984년 76세로 타계하였다.


<양달석의 애환>

1938년 조선 미술전람회 출품 준비를 앞둔 무렵이었다.

셋째아이가 뇌염에 걸려 살아날 가망이 없어 보였다.

입원비를 감당하려면 그림을 포기해야 할 처지였으나   아이는

아이대로의 운명이 정해져 있는 법이라며 마음먹은

그림 출품 준비를 서두르게 했던  아내의 격려가 눈물겨웠다. 부산에서

화구를 구해오는 등 한 달 동안의 준비가 다 되어

그림이 완성되던 날  셋째는 숨을 거두었고,여산은 같은 날, 손수 아이의 관을 짜고 그림액자를 만들었다.

그림은 서울로 보내고 아이의 관은 공동묘지로 보낸 뒤 며칠을 하염없이 통곡하며 지새웠다.

 38년에 이어 39년에도 작품이 입선되었다.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43년 부산 좌천동에 단칸방을 마련, 정착할 때였다.

비좁은 방 한 모서리에서 그림에 열중하던 중 발을 헛디뎌

생후 몇 달밖에 되지 않은  잠든 넷째 아이 위로 넘어졌다.

아이가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시름시름 앓다가 숨을 거뒀다. 그는 평소에

 그림 때문에 자식 둘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평생을  괴로워 했다고 한다.


< 양달석의 작품세계>

  소년은 풀밭언덕에서 잠이 들었다. 고단한 소년의 잠결에 꽃이 피고

나비가 날고 멀리 자신도 날아가는 꿈을 꾸었다.

 불현듯 잠을 깨고 주위를 살핀다. 서산엔 구름이 붉게 물들어 황혼을 알리고 있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소가 보이지 않는다. 사방을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찾아 봤으나 허사였다. 어느덧 소년의 눈에 눈물이 고여 들었다.

소를 잃어버린 소년은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달이 없는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소년은 피곤하여 잠깐  무릎맞춤으로 졸다가 깨어났다.

 별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고 무서움조차 잊고 있었다.

커다란 눈을 껌벅이면서 소가 소년을 지켜보고 있었다.

 소년이 자라면서 소와 목동을 주제로 한 얼마나 많은 그림을 그렸던가.

소년시절의 삽화 한토막이 적어도

 이 화가에겐 생의 운명을 좌우하는 모티브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자주 여산(黎山) 양달석의 캔버스에서 비가 쏟아지는

들녘에서 소의 품안으로 안겨드는 소년들을 본다.

그의 유화뿐 아니라 평판이 높은 수채화도 그 화풍으로 봐 동서양화를 아우르는 양식이다.

단청을 주색조로 조성하는 것은 불교적인 색채를 상징하며

 반점으로 쌓아 올린 질감 조성은 여산만의 기법이란 게 정평이다.

 물론 여산 자신은 그러한 한정된 기법이나 소재에서 한층 넓고 다양한

세계로 지향한다는 소망을 늘 털어 놓았다.

자신의 한계에 대한 반발은 누구나 갖는 자기탈피의 수단이 아니겠는가.

여산은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전업 작가로 그림에만 매달렸다.

 일제 치하 면서기 4년에, 해방 직후 미술교사 2년 남짓을 빼면 평생을 화업에만 바쳤다.

 그가 경남공립상업학교 미술반 교사로 있을 때 이런 일화도 있었다.

 해방 직후 주위 사람들에 떼밀리어 조선미술동맹 위원장을 역임했던

이력 때문에 경찰에 불려가 고문을 당했다.

 억울하지만 색깔 문제로 핍박을 받던 시절이었다.
"오른팔은 그림을 그려야 하기 때문에 왼팔을 두 배로 때려 달라"고까지 간청했다.

그런가 하면 말년에 협심증과 중풍으로 투병하면서 붓을 잡을 수 없게 되자

손에 붓을 묶은 뒤 그림을 그렸으니,

그 집념과 열정이 얼마나 치열했던가를 헤아리게 한다. 물론 그 나이 또래로서 그림 한 가지로 생애를

 꾸려가고 아이를 둘씩이나 유학 보내었던 것도 흔한 일이 아니다.
1984년 작고하기까지 동화의 세계를 이상향으로 그렸던 행복해 보이는 그림들,

그의 독특한 화풍과 함께 혼신의 힘으로 캔버스에 매달린 화가로 기억에 오래 남을 것이다.

그의 화비가 거제시 사등면 사곡리 삼거리 소공원에 세워져 있다.

 

오키이곳에 한국 화단의 거목 양달석선생의

기념관을 세우는 것은  어떨런지?


참고자료

1.시인 김규태의 인간기행

2.향토사학자 전갑생의 거제도이야기 100선

3.거제시지(2002년)

 

<옮긴 글>

 

 

소가 좋아하는 개망초(계란후라이꽃)

 

 

 

농부들(1958)

 

 

 

 

 

 

소와 아이들

 

 

소가  풀을 뜯는 동안 아이들은  말타기 놀이도 하고

귀신이야기, 도깨비이야기 등  무서운 이야기를 귀 쫑긋 세워 동무들로부터  듣곤 했을 것..

 

 

 

 

 

★ 거제시 사등면  성내리

 독로국의 왕성이었던 '성내마을 ' 

화가 양달석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다.

 

 

 

 

 

목동(1954)

 

 

 

 

 

 

 

 

 

 

화비에 새겨진  여산 양달석선생

 

 

 

 

 

양달석 선생의 고향  '성내마을'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관상 보는 사람들, (1963)

 

 양달석 선생의  모티브와는 좀 차이가 날 지 몰라도 개인적으로는 '관상 보는

사람들'이란 이 그림이 제일 맘에 드는 듯하다.

사람들의 표정이 너무나 재미있게 느껴진다. 수묵화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느낌이 좀 나고, 가운데 할아버지의 진지한

그러나 무거움은 느껴지지 않는 표정이 나로 하여금 즐겁게 만든다. 특히 뒤에 붙어있는

사람인지 햇님인지는 모르겠으나 살짝 미소 짓고 있는 얼큰이 얼굴이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는 느낌이다.

한번 직접 보면 마음이 즐거워질 것 같다는 느낌이다. 진짜 한젬마 씨의 설명처럼

 그림은 온통 즐거움으로 평화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는 느낌이다. 만약에 저처럼 처절한 일화가 없었더라면 그저 목가적인 생활을 즐겼던

분인가 보다 하는 생각만 했을 듯하다. 그 분이 그림을 이렇게 그린 건 그림에서 유토피아를

추구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양달석의 작품감상>

<옮긴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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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가,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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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가,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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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작으로 《농가(農家)》(1953년,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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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동,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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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선암, 1970